더 랍스터 (The Lobster, 2015)

개인 평점 : ★★★★☆

한 줄 요약 :  정의내릴 수 있는 사랑을 하느니, 갑각류로 살겠다.




44, 45 사이즈 구두는 있어도 44 반은 없는 곳. 이성애자, 동성애자는 있어도 양성애자는 없는 곳. 커플이 있고, 외톨이가 있지만 그 외의 존재는 동물이 되는 곳. 어디 다른 세계 이야기던가. 지극히 이분법적인 '더 랍스터'의 세계관은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이곳과 너무나 닮아서 영화 같지가 않다.

이하 감상. 스포일러가 있을 수도.

45일 안에 커플이 되지 못 하면 동물이 되는 호텔에서 도망친 남자는 외톨이의 숲으로 간다. 하지만 외톨이의 숲에서 자신과 똑같이 '근시'를 가진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사랑을 나누면 살아남지 못 하는 외톨이의 세계에서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와 도시로 도망치지만, 결국은 어디로도 도망치지 못 한다. 어느 곳에도 속하고 싶지 않아 울타리를 넘었던 남자는 결국 어딘가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버린 것이다.

영화는 역설로 가득하다. 골계미가 넘친다. 사람은 둘이어야 온전하다고 외치는 호텔의 매니저는 둘이어야 하는 이유를 체했을 때 도와줄 수 있어서, 강간의 위험에서 안전할 수 있어서 등, '둘이지 않아도' 가능한 사례를 들어 강연을 펼치고, 죽음의 위기 앞에서 남편과 서로 죽음을 미루기 바쁘다. 외톨이의 수장인 여자는 새로 온 멤버에게 진한 포옹으로 인사를 건네고, 주기적으로 부모님을 찾아가 자신의 안부를 묻는 부모님에게 그럴싸한 변명을 하기에 바쁘다.

자위행위를 한 호텔의 남자는 토스트기에 손을 집어넣는 형벌에 처해지고, 연분이 난 외톨이 숲의 남녀는 입술이 잘려야 했다. 반면, 호텔에서 외톨이를 사냥할 때도, 외톨이의 숲에서 호텔을 급습할 때도, 그들은 서로의 '피'를 보지 않는다. 고고한 이유로 서로의 이념을 부인하는 두 집단은 묘하게도 스스로의 집단에게만 엄격한 모습을 보인다. 강요란 그런 것이다. 죽어라 외치지만, 설득에 의미가 있기보다, 자신의 의미를 관철하는 데 있는 것이다.

너무나 담담하게 슬랩스틱을 구사하고, 너무나 진지하게 모순을 연기한다. 선천적으로 코피가 자주 나는 여자를 꼬시기 위해 책상에 코를 찧어대는 남자. 감정이라고는 없는 사냥꾼 같은 여자를 꼬시기 위해 형의 죽음 앞에서도 유머를 구사해야 하는 남자. 그런 그들은 다리를 저는 자신과 같은 다리를 저는 여자를 만나길 원하고, 근시인 자신과 같은 근시인 여자를 만나길 원한다. 기껏 영화에서 등장하는 깊은 유대가 절름발이로서의 유대, 근시로서의 유대가 전부인 것이다. 그리고 수단이 되어버린 하찮은 유대가, 영화의 결말을 장식하기까지 한다.

멍하니 등 기대어 앉아 있으면 내 손을 끌고 엔딩 크레딧까지 데려가는 영화가 있고, 극장을 나서서 이부자리에 눕고 나서야 엔딩 크레딧이 올라오는 영화가 있다. 오랜만에 '잘 들었어요?' 대신 '어떻게 들었어요?'라고 묻는 영화를 만났다. 영화의 철학을 읽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당신이 이 영화를 보고 피식 했다면, 혹은 몇 장면을 놓칠 만큼 사색에 잠겼다면, 감독은 얼마나 기뻐할까.

내가 아파서 너도 아프길 바랐고, 네가 아파서 나도 아파야만 다가설 수 있을 것 같았던 지난 날들을 가슴이 저릿하게 반성하고 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나는 사람이기보다, 랍스터가 되고 싶었다. 말 없는 동물이 된다면 네가 나를 다시 한 번 돌아볼 것 같았다.

'객석에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포트라이트 (Spotlight, 2015)  (0) 2018.01.09
나인 하프 위크 (Nine 1/2 Weeks, 1986)  (0) 2018.01.09
미스터노바디 (Mr.Nobody, 2009)  (0) 2018.01.06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