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Spotlight, 2015)
개인 평점 : ★★★★☆
한 줄 요약 : 언론영화의 재발견이자 저널리즘의 재발견. 영화를 넘어, 묵직한 고발.
언론인이란 무엇일까. 그저 소식을 전하는 사람? 말을, 혹은 글을 옮기는 사람? 사전적 의미에 의하면 그도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기자가 ‘하는 일’과 기자가 ‘갖춰야 하는 소양’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기레기’라는 신조어가 있다. ‘기자’와 ‘쓰레기’의 합성어로 기자답지 못한 기자를 일컫는 말이다. ‘기자’의 위신이 이렇게까지 떨어지게 된 데엔 시대적 흐름도 큰 몫을 했을 것이다. TV, 라디오, 신문을 넘어 뉴스를 접할 수 있는 매체나 플랫폼이 무궁무진해진 지금. ‘좋은 기사’보다는 ‘많이 보는 기사’가 더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영화 <스포트라이트>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마치 영화로 풀어낸 기사처럼 말이다. 영화적 구성으로 사건을 재현한 시퀀스를 풀어내거나 가공된 세력과의 긴장감을 연출하는 데 힘을 쏟는 대신,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사실적 동선에서 사건을 짚어나간다. 이는 관객들로 하여금 오히려 닿을 듯한 거리감을 느끼게 하고, 내 일처럼 불편한 기분이 되게 한다. 스포트라이트의 대강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보스턴의 일간지 보스턴 글로브의 특종팀 ‘스포트라이트’는 가톨릭 보스턴 교구 사제들의 아동 성추행 사건을 취재 중이다. 여태 그랬듯 적당한 선에서 훑어내고 끝났을 취재가 마티 배런이 새 편집장으로 부임하면서 새로운 형국으로 접어든다. 당시 소송에 들어간 신부의 사건만이 아니라, 이를 방관한 신부에 대해서도 밝혀내라는 지시가 떨어진 것이다. 하지만 스포트라이트팀이 이를 취재하기 시작하면서 이번 성추행 사건은 그저 빙산의 일각이었음을 깨닫는다. 취재를 하면 할수록 피해자가 더 나타났고, 가톨릭에선 이를 방관하다 못해 사건을 묻기까지 해온 것이다. 스포트라이트는 사법부와 가톨릭의 유착, 그리고 ‘사건’이 아니라 ‘현상’이라 불러야 바람직할 사제들의 관습척 추행에 대해 듣게 되고, 마침내 성추행에 관련된 사제가 아흔 명에 다다른다는 사실까지 알게 된다. 하지만 증거 수집은 커녕 접근조차 어려운 상황에서 가톨릭이 뿌리내린 사법체계의 벽은 높기만 하다.
기자는 나무가 아닌 숲을 본다. 사건을 문장으로 풀어내는 건 숲을 모두 뜯어본 후의 이야기이다. 한 그루 한 그루의 나무에 집착하면 사건의 전부를 읽을 수가 없다. 사제 한 명의 아동 성추행 사건. 이를 ‘기레기’가 다루느냐 ‘진짜 기자’가 다루느냐에 따라 사건은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는 것이다. 영화 후반, 레젠데스는 법원으로부터 사제들의 관습과도 같은 아동 성추행에 대한 증거를 확보한다. 이에 당장 기사를 실어야 마땅하다고 로빈슨에게 말하자, 로빈슨이 말한다. ‘개인이 아닌 시스템을 봐야 돼’. 기득권층에 뿌리내려 피해자의 목소리를 짓밟고, 사제들을 보듬어온 가톨릭 전체를 고발할 수 있을 때 기사를 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의견차를 좁히지 못 해 언성을 높히는 두 배우의 언쟁을 보고 있으면 전율이 느껴진다. 사회의 정의를 위해 기사를 싣는 시점까지 고려하는 기자의 모습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기자들의 모습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모든 사건의 이면엔 더 큰 사회문제가 있고, 시스템의 횡포가 있을 수 있다. 참된 기자란, 데스크에서 시작해 데스크에서 끝나는 취재가 아닌 ‘숲’을 보는 취재를 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선 당연히 숲을 가로질러 걸어보아야 한다. 이를테면 가톨릭 교구를 찾아가야 할 수도 있고, 피해자와의 인터뷰를 위해 카페를 가야할 수도, 증거자료 확보를 위해 법원에 가야할 수도, 성추행 사건 중재를 맡은 변호사를 설득하기 위해 골프장이나 자선 파티에 가야할 수도 있다. 이처럼 작은 노력들이 모이고 모여 사건은 사실이 되고, 명확한 진실이 된다. 그리고 비로소 독자들이 신문을 받아들었을 때 기사에 힘이 실리는 것이다.
특종팀의 수장 로빈슨이 수십 명의 사제들을 중재한 변호사 에릭을 찾아갔을 때, 곧 죽어도 사제들의 명단을 줄 수 없다는 에릭에게 위협적인 어조로 말한다. ‘두 가지 뉴스가 있다, 사제들의 성추행을 감춰온 가톨릭을 고발하는 뉴스와, 가톨릭과 함께 성추행 사실을 쉬쉬한 변호사의 이야기. 선택해라’ 결국 에릭은 명단을 넘겨주게 된다. 이처럼 언론의 힘은 막강하다. 한 기관 자체를 흔들 수도 있으며, 권력이 은폐한 사실의 베일을 벗길 수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개인이 절대 대항할 수 없는 권력에 함께 저항해줄 수도 있으며, 개인의 힘으로 파헤치기 힘들었던 불의의 역사를 파헤쳐줄 수도 있다.
언론인은 ‘사실’을 ‘사실’로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왜곡되지 않은 사실을 뉴스로 접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언론인들의 노고가 필요한지는 그저 기사문 몇 줄로는 헤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면 수 세기의 정보를 얻을 수있고, 지구 반대편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시대. 그럼에도 우리의 시국을 보라. 진실이 결핍된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언론인의 눈을 통해 비로소 ‘진실’을 마주할 수 있는 것이다. 언론인은 어둠 속에서 넘어지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촛불 같은 존재라 할 수 있다. 스포트라이트는 언론영화의 재발견이자 저널리즘의 재발견이다.
'객석에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인 하프 위크 (Nine 1/2 Weeks, 1986) (0) | 2018.01.09 |
---|---|
더 랍스터 (The Lobster, 2015) (0) | 2018.01.06 |
미스터노바디 (Mr.Nobody, 2009) (0) | 2018.01.06 |